영화 <기생충>에 4관왕을 안긴 ‘지역행사’로서의 아카데미 시상식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 최초의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이러한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봉준호 감독은 ‘지역행사’로서의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을 주문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더라면 ‘기생충’의 이번 도전은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아마 후보 지명에만 그쳤을지도 모릅니다.

아카데미 상(Academy Awards) (출처: pngimg.com )

주요 국제영화제 수상작들도 아카데미상 수상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 아카데미 시상식의 ‘상업주의’가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어로 제작된 ‘기생충’에 4개의 오스카를 안긴 이번 시상식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미국 영화 예술과학 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s Arts and Science, 이하 아카데미)의 홍보마케팅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지역(local) 행사로서의 아카데미 시상식 

지난 해 가을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상이 ‘지역(local)에 기반한’ 행사라고 말했습니다. 일부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의도적인 ‘도발’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짚어낸 것으로 보는게 더 타당해 보입니다.  

사실 시상식은 많은 조직에서 활용되고 있는 홍보마케팅 도구입니다. 조직은 내부 구성원 또는 외부인에게 상을 수여함으로써 시상식의 취지를 널리 알리고 동시에 자신의 권위와 위상, 대외적 영향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물론 권위를 인정받는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수상자는 영예와 수상에 따른 후광효과를 얻게 됩니다. 아카데미와 주요 국제영화제들은 각기 설립취지에 따라 수상자 및 수상작을 선정, 발표하고 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산업을 통한 세계적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이 ‘지역행사’인 이유는 주요 국제영화제와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심사 대상이 다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미국영화나 미국에서 개봉된 외국영화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주요 국제영화제의 심사대상은 세계 각국에서 출품된 작품들입니다. 또한, 주요 국제영화제에서는 미개봉작도 수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국 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받으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 로스 앤젤레스에서의 개봉실적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심사방식의 차이입니다. 주요 국제영화제에서는 부문별로 위촉된 심사위원들이 수상작을 결정합니다. 반면에 아카데미에서는 지난 몇년간 일정한 수준의 활동을 한 현역 회원들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합니다. 또한,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에는 문학가나 연예인 등 영화계 바깥의 인물도 초청됩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회원자격은 실제로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제한되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현업 영화인들만 시상식에 투표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세계 각국에서 출품된 영화를 심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로컬’ 행사로 봐야 한다는 봉준호 감독의 표현은 핵심을 정확하게 짚고 있습니다. 다만, 미국 영화산업의 세계적인 영향력 때문에 아카데미 상을 전 세계 영화에 대한 평가결과로 간주하거나 가장 권위있는 영화 시상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입니다. 마치 메이저 리그(MLB)에서 양대 리그간의 결승전을 ‘월드 시리즈’라고 부른다고 해서 진정한 글로벌 게임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변화의 바람: 다 계획이 있었구나

전통적으로 미국 영화인들은 사회 내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배우들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운동, 월가 점령 시위, 미투 운동 등에 동조하는 목소리를 내어 왔습니다. 더욱이 보수적인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 이익 최우선정책을 펼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중앙일보 “미국 대륙을 넘어…오스카 계획이 있었구나’) 아카데미는 미국 중심의 사고를 버리고 세계 영화 속의 미국 영화라는 인식 속에서 ‘새로운’ 세계화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50대 이상의 백인 중심이라는 비판을 받아 온 아카데미는 2015년부터 한국 영화인들을 회원으로 위촉하는 등 아시아권 영화인에 대한 문호도 점차 넓히고 있습니다.  또한 2020년 부터 <외국어 영화상> 시상부문을 <국제장편영화상>이라는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다만, 미국 영화계 안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 영어권 작품에 대해 인색했다는 평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아카데미의 이해관계자

아카데미에게는 회원들 외에도 언론, 영화팬(소비자), 영화사, 비평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카데미의 방향성에 대해 이해관계자들과 같이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상식 초기 부터 언론은 아카데미의 중요한 파트너였습니다. 라디오 중계, TV 생중계 등을 거치며 , 아카데미 시상식은 수퍼볼을 제외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출처: 나무위키). 약 20년 전부터는 광고수익과 직결되는 시청률을 고려해 시상식을 평일에서 주말로 옮겼습니다. 과거 오스카상 도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언론의 관심을 얻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미국 영화 팬들의 경우, 이번 시상식 관련 기사에 불만을 토로하는 댓글을 남기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국제장편영화상을 따로 만들어 놓고서, 외국영화에 작품상까지 주는 것은 ‘중복’이라는 문제제기에서 부터 영어로 제작되지 않은 작품에게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작품상을 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도 있었습니다. 수상자 및 수상작 선정이 투표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팬들의 반응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행히 시상식 전부터 미국 언론에서는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가능성을 높게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기생충’의 제작을 지원한 CJ측에서 현지 언론, 영화인, 지역 영화제 등을 상대로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펼친 덕분에 이번 ‘사태’는 아카데미의 ‘해피엔딩’이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뭏든 주최측으로서도 각 시상 부문의 취지 및 수상작의 가치와 관련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는 것의 중요성은 분명해 보입니다. 

‘언어 장벽은 이미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자막 장벽’에 관한 뉴욕타임즈 기사

아카데미는 이번 시상식을 통해 자신들이 다양성과 함께 국제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미국 매체와 아카데미 회원들을 상대로 조직적인 ‘캠페인’을 펼친 ‘기생충’이라는 걸출한 작품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조직의 지향점이 있다고 해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에 상을 준다면 시상식의 권위와 신뢰도가 훼손되고 결국 영화 팬들과 비평가, 언론은 등을 돌리고 말 것입니다. 시상식 시청률이 꾸준히 하락세를 보이는 가운데 아카데미는 시상식 결과에 불만을 가진 미국 영화팬들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친숙한 감독, 배우가 만든 영화의 ‘선전’을 기대하는 기존 ‘헐리우드’ 관객들도 여전히 많기 때문입니다.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미국내 ‘기생충’의 확대상영이 시작되었습니다. 뉴욕타임즈 기사의 분석처럼 ‘자막 장벽’은 스트리밍 서비스 확대와 더불어 미국 안팎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인치 자막’ 영화들이 미국 시장을 계속 두드리면서 관객들도 빠르게 ‘글로벌’ 아카데미와 눈높이를 맞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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